요즘 자꾸 녹번동을 걷게 되는 이유
어떤 동네는 처음부터 친절하다.
어디를 봐야 하는지, 무엇이 유명한지, 어디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지 금방 알려준다.
반대로 어떤 동네는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천천히 걸어야 하고, 여러 번 지나쳐야 하고, 가만히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녹번동은 내게 그런 동네다.
녹번동 골목이 좋은 이유
처음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였다.
낮은 빌라들이 줄지어 있고, 오래된 담벼락과 익숙한 골목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평범하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풍경을 오래 바라보면
그 안에만 있는 결이 보인다.
볕이 잘 드는 옥상에 널린 빨래들.
창틀마다 다른 모양으로 자란 화분들.
누군가 정성껏 쓸어낸 골목 앞 작은 마당.
생활은 늘 화려하지 않은 곳에서 가장 아름답다.
녹번동의 골목은 반듯하지 않다.
직선으로 뻗기보다, 사람 사는 모양대로 조금씩 꺾이고 이어진다.
길을 걷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만난다.
담장 너머 감나무, 계단 끝 작은 텃밭,
벽에 기대 선 자전거 한 대,
햇빛 아래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
이 동네는 계획된 장면보다 우연한 장면이 많다.
좋은 산책은 무엇을 보는가보다
어떤 속도로 걷는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한다.
녹번동에서는 이상하게 걸음이 느려진다.
빨리 지나갈 이유가 없고,
다음 장소를 서둘러야 할 이유도 없다.
잠시 멈춰 서서 식물을 보고,
골목 끝으로 들어오는 빛을 보고,
창문 너머 저녁 준비를 하는 생활의 기척을 듣게 된다.
그럴 때 서울도 아직 사람 사는 도시처럼 느껴진다.
동네책방 더누크에서 쉬어가기
걷다가 마음이 마르면 나는 작은 서점으로 들어간다.
더누크 같은 동네책방은 그래서 좋다.
문을 열면 책 냄새와 커피 향이 함께 있고,
세상은 잠시 바깥에 두고 들어올 수 있다.
책등을 천천히 훑다가 한 권을 꺼내 읽고,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면
산책으로 열어둔 마음에 문장이 조용히 들어온다.
동네를 걷고, 책을 읽고, 다시 걷는 일.
그것만으로 하루가 제법 단단해진다.
서울에서 조용한 산책이 필요하다면
녹번동은 크게 감탄할 곳이 많은 동네는 아닐지 모른다.
대신 작게 좋아할 곳이 많은 동네다.
누구는 이런 장소를 심심하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이제 안다.
심심한 동네가 아니라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동네라는 것을.
요즘 자꾸 녹번동을 걷게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 동네에서는
나도 조금 조용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